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문단 편집) === 전후의 평가 === >독일군 병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노르망디]]에서 공군의 지원 없이 연합군 군대와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그들에게는 고위 지휘 체계가 무질서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 7월 20일에는 여러 장군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함으로써 독일군이 위기를 맞았다. 내가 보기에 그 장군들은 옳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을 '축출'하는 것은 장군들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스스로 해내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히틀러 청산은 연합국의 철저한 [[탈나치화]] 교육에도 불구하고 이뤄지지 않다가 서독에서 1970년대부터 새로 집권한 세대가 히틀러의 반인륜 범죄를 제대로 공개 및 단죄하기로 합의하면서부터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반나치화 교육을 받고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권위에 따르다가 국가가 초토화된 이유에 의문을 갖던 세대가 결국 전 세대의 행적을 다시 파면서 시작된 것이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회고록 <전쟁의 역사>, 1968년 종전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한스 슈파이델]]을 위시한 암살자 그룹 멤버들의 회고록이 먼저 발간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에 의해 목숨을 잃은 옛 동료들을 추모하며 자신들의 높은 이상에 동참하지 않았던 독일군 장교들을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모조리 동원하며 매도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마무리되고 국방군의 유명 지휘관들이 석방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로이센 장교들은 "군인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방향성은 조금 다르지만 위의 몽고메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무려 암살 미수 사건 24년 후에 출판된 회고록임에도)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참전한 연합군 고위 장성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1950년대에 발표된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위의 몽고메리의 글과 비슷한 내용으로 암살자들에 대한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암살자들의 높은 이상에는 동의하지만 나치 친위대와의 유혈 투쟁으로 내전이 발생했을 것이고 외교적으로도 아무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은 '무조건 항복' 이외에 어떤 협상도 불가한 입장이었기 때문."~~사실 이 평가조차 제일 잘 내준 평가이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 다만 멜렌틴 소장은 전후 [[깨끗한 국방군]] 신화 건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목되는 인물이므로 그의 평가는 걸러 들어야 한다.] 아울러 다른 장성들에 대한 암살자 그룹들의 비난에 대하여 비방에 가까운 사실 왜곡이라며 이를 반박했다. 독일군의 명장 [[구데리안]]과 [[만슈타인]], [[파울 하우서]] 등은 '그놈들은 그냥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어떻게든 자기 살길 찾으려고 일을 벌인 기회주의자들임에 불과하며 오늘날 가담자들이 받는 대우는 놈들이 아닌 전선에서 싸운 장병들이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암살 미수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도 이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조지 S. 패튼]]은 '멍청한 놈들'이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나치당 관헌들은 전투 부대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고 이들에 대한 불만이 치솟으면서 종전 후에 이러한 현실을 바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음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장병들은 매우 분개했으며 암살자 그룹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그들의 임무를 다했다. 국내에도 발간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에는 '1945년 이후, 저항 조직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들은 진정한 이상주의자들의 특징인 겸손함을 잃어버렸다. 유감스럽게도 1944년 7월 20일 사건으로 인해 처형당했던 사람들은 독일 국민에게 어떤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저항 조직원들의 죽음이 일선의 장병들의 죽음보다 덜 존귀하지도, 더 존귀하지도 않다.'고 평가한 내용이 있다. 고위 장교들을 비롯한 [[독일 국방군|국방군]]의 젊은 하급장교들을 비롯한 일선의 장병들의 인식이 이토록 부정적이었던 대표적인 이유는 당시 독일군 내부에는 '''이 전쟁은 이미 졌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암살자 그룹들은 작전을 짜 나아갔다. 즉 서부 전선 방어군 원수 [[에르빈 롬멜]]과 [[귄터 폰 클루게]]그리고 [[구데리안]]을 비롯한 주요 OKH 즉 국방군 육군 총참모부에서 양면에서 압박을 가해오는 소련군과 연합군을 막기 힘들며 협상을 해서 '''전쟁으로 국토가 망해버리기 전에 휴전을 하자'''는 아이디어를 기존의 히틀러 반대 장교들이 발전시켜서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에서 명시된 최고위 장교들이 생각한 협상이란 ''''어느 정도 [[프랑스]]에서 격전으로 연합군이 힘을 빼고 있는것을 이용해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설득하여 우선 연합군과 휴전하고! 서부전선의 전 독일군을 동부전선으로 투입하여 소련군의 공세로 분쇄된 독일 동부군을 재건하여 전선을 안정시킨 후 휴전한다''''였다. 즉 최고위 장교들은 히틀러 없는 휴전이 아니라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 독일의 휴전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안네의 일기]]에서 지적된 내용처럼 한숨을 돌린 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히틀러에게 휴전을 할 것을 조르던 고위장교들이 당연히 암살자 그룹의 생각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 [[독일 공군(나치 독일)|루프트바페]] 연락장교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1944년 8월 5일 총살되었다.]에 대해 실시된 [[게슈타포]]의 심문기록이 전후 연합군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7월 3일 [[귄터 폰 클루게|클루게]]와 [[에르빈 롬멜|롬멜]]을 만난 그는 이들에게 서부전선에서 서둘러 휴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를 총통이 끝까지 반려할 경우 총통에 대한 일련의 최종적인 제재나 행동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것은 바탕으로 서부전선 고위 장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한 제재나 행동은 결코 '''히틀러 제거'''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의 제재나 행동은 군사적 부분이었다는 것과 정치적 부분을 비롯한 타 부분에서의 권력을 박탈할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는것이 모든 연구의 동의사항이다. 동부전선 고위 장교들은 서부전선보다 더 뼈저리게 전쟁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를 위시로 한 제국의 휴전만 지지했을 뿐 총통 없는 독일 공화국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일선의 독일군 장병들과 하급 장교들, 그리고 심지어 독일 국민들에게도 공통적인 사항이었는데 이들 모두 전쟁이 이 꼬라지가 난것에 대해 분명 총통에 대한 의심과 불만은 있었지만 오직 '''군사적 역량'''에 대한 것이었지 정치적 역량에 대한 것은 없었다. 아니 심지어 있었지만 앞서 [[버나드 몽고메리|몽고메리]]가 지적한 것처럼 독일군 전장병들과 장교들 그리고 국민들은 그걸 정치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았지 군인들이 쿠데타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았다. 또 [[프로이센]] 제국의 위대한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게르만족|독일 민족]]에게 있어서 군인으로서 서약한 것을 목숨으로 지킬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뇌리 속에 강렬히 박혀있었다. 즉 전쟁에서 밀려 매일같이 연합군으로 부터 열심히 얻어맞고 있었지만 전쟁 전 총통의 정치적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 저 유명한 선서인 국방군 서약에 따라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슈타포]]를 위시한 [[슈츠슈타펠|친위대]]의 악행에도 독일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총통의 정치적 역량과 독일 민족을 이끄는 리더십'''을 부정하고 뒤집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그 무엇보다 전쟁 발발 후 폴란드, 프랑스, 영국 본토와 대서양, 발칸 반도 그리고 지옥같은 소련 영토에서 앞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전사한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장병들과 장교들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독일인들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독일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암살 행위는 앞서 참혹하게 전장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안위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개시했다고 보는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이 암살 미수작전에 참여했던 장교들 중에는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장교들도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들은 그저 총통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잔악상을 기준으로 뽑힌 사병들과 달리 SS 나치 친위대 중에서도 [[히틀러 유겐트]], [[나치 돌격대|갈색 셔츠 돌격대]]나 청년 돌격대, [[나치당]] 입당 절차를 거친후 그중에서도 [[나치즘|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충성과 이해도가 높은 이들로만 구성된 [[게슈타포]]와 제국 보안부 그리고 SD 방첩대에서 잔악성을 인정받은 이들로 구성된 장교들이었다. 독일 국민들에게는 이들이 안위를 위해 암살을 시도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하던 작자들이었다. 이들이 독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전쟁으로 초토화될 독일을 염려하여 암살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는 게 당시 자연스러웠을까? 독일 국방군의 하급장교들과 장병들이 서부와 동부에서 각각 히틀러에게 저항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그럴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됐다. 그만큼 독일군과 국민들은 히틀러와 나치당 그리고 나치 수뇌부의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히틀러를 [[역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1932년 이래 전폭적으로 지지]]해온 이유, 즉 '''[[지도자 원리|독일 국민들을 이끌어 나갈 역량을 갖춘 유일한 지도자]]'''라는 것을 부정할 만큼은 아니었고 부정할 생각조차 없었다. >큰 뉴스! 히틀러 암살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도, [[영국]]의 [[자본가]]도 아닌 훌륭한 독일의 장군으로, 그것도 아주 젊은 [[백작#s-2.3]]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와 화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히틀러와 함께 있던 수 명의 장군과 장교가 죽거나 다치고 주범은 사살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전쟁에 지쳐 히틀러를 없애려는 장군이나 장교가 많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제거하면 군인 출신 독재자를 옹립하고, 연합군과 강화를 맺은 다음 재군비를 해서 20년 쯤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할 속셈이겠죠.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로 히틀러의 죽음이 늦춰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적의 독일군들끼리 서로를 죽여준다면 연합군측은 훨씬 유리하고 편하겠죠. 그렇게 하면 소련군과 영국군이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겪는 고생이 가벼워질 테고, 그만큼 빨리 파괴된 자기 나라의 도시 부흥에 착수할 수 있을텐데요. >----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1944년 7월 24일 당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네의 일기]]에서도 그녀는 이 사건을 은신처에서 듣고 일기로 썼는데 암살 계획에 대해서 비슷하게 다음에 다시 전쟁이나 일으키겠지라는 식으로 적혀 있다.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암살범들은 유대인을 마찬가지로 미워하던 자들이라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는지 자못 냉소적으로 씹고 있다. 암살 주도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유대인을 학살하고 다닌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들이 함께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10대 [[청소년]]이 스스로 논평을 내렸다기보단 그런 인식이 이미 대중 사이에 짙었다고 보는 게 좀 더 타당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